홍로그

극주관주의 포스팅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음식 문화

1.

고대 그리스는 

초기에는 포도나 무화과, 대추야자 등의 건조과일,견과류를 먹었다.

과일은 그대로 먹게 되면 수분이 많아 필요한 칼로리를 얻기 전에 배탈이 나기 때문에 건조해서 먹었다.

중기는 곡물을 입수하면서 콩이나 깨, 대맥을 빻아 만든 죽을 먹었다.

밀죽은 그리스인들에게 사랑받아 후대에도 계속 먹게 되었다.

기원전 5세기 이후는 각종 밀로 더욱더 맛있는 빵이 만들어 졌다.

약 70종류 이상이 확인되고 있다.

고기는 어패류를 즐겨먹었고, 짐승고기는 방목을 할 여유가 없어 가축이 있어도 소는 노동력,양은 털을 깍는데 사용하기 때문에 거의 먹지 않았다.

짐승고기는 의식 때 제물로서 죽인 동물을 먹는 것이 한계였던 것 같다.

그리스는 땅덩이가 좁은 데다가 땅도 척박하여 주식이 되는 밀류는 수입을 해야 했다.

그리하여 교역이 발전하였고 기원전 1000년전 부터는 올리브나 와인을 수출하게 된다.

덕분에 풍요로워져서 고기를 먹게 되는 등 생활습관이 바뀌게 되었다.

2.

수학자,철학자로 유명한 피타고라스는 채식주의를 제창했다.

하루에 두끼만 먹었고, 그 메뉴는 검은 빵, 야채, 과일 벌꿀 등이었다.

그가 좋아했던 건 양상추였다.

피타고라스는 고기 뿐만 아니라 콩도 절대 먹지 말라는 규율을 세웠다. 

이유는 콩 알레르기, 콩으로 인한 사망, 콩을 숫자를 세는데 썼기 때문이라는 등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가장 유력한 설은 피타고라스가 인간과 콩의 근본이 같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피타고라스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콩을 진흙 속에 묻어 몇주 동안 두었다가 회수하는 등 과학 실험도 수차례 시행했다고 한다.

그에게 콩은 인간의 태아와 닮았다.

3.

스파르타 남성들의 독특한 풍습 가운데 하나가 공동 식사다. 

경제적 여건이나 지위를 가리지 않고 15명이 한 조를 이루어 식사를 했는데, 이것은 단순한 식사조가 아니라 함께 싸우는 전투조이기도 했다.

스파르타 남성들은 20세에 아고게를 졸업하면 30세까지 군대에 복무해야 했다. 

30세가 지나면 가정을 이룰 권리가 주어지지만 그래도 저녁식사는 꼭 부대에서 해야 했다.

스파르타 남성들은 50세까지 전투에 참가해야 했다.

스파르타인들은 평소에는 형편없는 빵과 담즙이 들어간 쓴 검은 수프를 먹으며 가혹한 환경에서 단련했다.

스파르타의 왕일지라도 일반 시민들과 똑같은 식사를 했다.

워낙에 맛이 없기로 유명했는데 어느 아테네인이 먹어 보고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테네의 돼지가 먹는 것도 이것보다는 낫겠다. 스파르타인이 왜 이리 용감한 줄 알겠다! 이런 걸 먹고 사느니 죽겠다고 싸우지!”

평소에는 맛없는 식사들만 먹다가 전쟁에 나가게 되면 오히려 살아있는 산양과 닭 등을 끌고 가서 매일 직접 도살해 신선한 고기를 공급해 줬다고 한다.

곧 전장에 나갈 사람의 사기와 기운을 북돋아주기 위한 특식이라고 볼 수 있다.

전시에는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전쟁을 기다렸으며, 평화는 불쾌하다는 자기암시를 걸었다.

4.

고대 로마인들은 생선으로 만든 피쉬소스인 가룸(Garum)을 음식에 조미료로 사용했다.

소금에 절인 생선을 태양 아래에서 부패시키면 내장에 포함된 소화효소가 생선의 단백질을 아미노산으로 분해한다.

암모니아 등의 악취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주정이나 향신료 등을 더한다.

커다란 항아리에 허브, 생선, 소금을 켜켜이 쌓아 8개월 정도 숙성시켜 마지막에 걸러낸 액체가 가름이 되었다.

만드는 중에 지독한 악취가 났기 때문에 시내외곽 지역에서 만들었다.

로마의 음식 문화에 익숙치 않았던 이방인들이 먹기에는 다소 생경한 음식이었던 듯 하다.

예컨대 968년, 신성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오토 1세의 사절로서 동로마 제국에 파견되었던 크레모나 주교 리우트프란트는 니키포로스 2세로부터 만찬을 대접받았는데, 음식에서 풍기는 가룸의 비린내를 견디고 품위를 지키느라 몹시 힘들어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결국 리우트프란트는 모든 음식마다 잔뜩 뿌린 가룸의 비린내가 너무 역겨워서 음식을 거의 못 먹고 굶었다고 한다.

5.

로마인들은 아침을 매우 가볍게 먹었다.

아침을 푸짐하게 먹는 사람들은 교양이 없다고 여겼다.

먹기 전에 같은 음식을 제단에 올려 아침의 기도를 올렸다.

내용물은 빵과 치즈, 그리고 과일 약간이었다. 우유나 와인에 빵을 적셔 먹기도 했다.

집에서 먹지 않는 사람들은 식당에서 먹거나 노점에서 사먹었다.

서민들이라면 직장에 가거나 ‘파트로누스’의 집에가면 아침식사가 든 바구니를 받았다.

‘파트로누스’는 평민을 보호하는 귀족을 말한다.

많은 백성들은 가족이나 노예를 부양하고 있었지만, 그 시민들도 또한 고용자인 귀족에게 부양되는 게 로마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중 한 예가 이러한 아침의 선물이었다.

아이들은 새벽부터 학교 수업이 있었다.

그들은 등교 도중에 거리에서 파는 과자를 사서 먹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벌꿀이나 나무열매, 치즈가 들어간 롤빵과 파이가 잘 팔렸다.

아이들은 점심 때 집에 가서 식사를 한 뒤 다시 학교에 돌아갔다.

정해진 것은 아니었고 아침이나 점심 식사를 하는 것은 각자의 자유였다.

6.

로마인의 식사횟수는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3회 정도였다.

그중 하루에 한 번은 ‘케나(정찬)’로 제대로 된 식사를 하였다.

케나는 처음에는 점심식사였지만 점심때는 더위로 식욕이 없어지기 때문에 저녁에 하게 되었다.

케나 이외의 식사는 가벼운 식사나 간식을 의미했다.

7.

로마의 시민들은 오후에 ‘시에스타’라고 하여 낮잠을 잤고 일어나면 공중목욕탕에 갔다.

공중목욕탕에는 욕탕이 있는 게 당연하지만 그 외에 마사지나 게임, 운동설비 등이 마련돼 있었다.

현대의 찜질방 같은 것으로, 독서나 대화로 시간을 때우는 사람도 있었다.

공중목욕탕에는 비스켓,기름에 튀긴 스낵,야채 마리내, 과일이나 말린 과일, 고기완자나 생선 파테, 소시지 등을 팔았다.

시민들은 목욕탕에서 부자들과 알게 되어 케나에 초대받는 걸 기대했다.

공짜로 귀한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초대받을 때까지 목욕탕에 드나드는 사람도 있었다.

8.

로마의 부유층은 전용의 긴 의자 ‘트리크리니움’에 누워서 식사를 하는 특이한 습관이 있었다.

‘트리크리니움’의 재질은 목재, 청동, 상아, 은 등으로 위에 쿠션이나 깔개를 깔아 사용했다.

긴 의자 하나는 3인용으로 테이블을 ㄷ자로 감싸는 것처럼 3대를 놓았다.

그렇게 때문에 케나의 출석자수는 9명, 조금씩 붙어 누워도 10명 전후였다.

좌석에는 상석과 하석이 있어서 사회적 지위에 따라 앉는 위치가 엄격하게 정해져 있었다.

주빈은 ‘집정관의 자리’라고 하는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했다.

만일 여자가 손님으로 참석하는 경우에는 눕지 않고 앉았다.

로마 여성이 남성과 마찬가지로 비스듬한 자세로 연회에 참석한 것은 로마 중반기가 넘어서이다.

또한 케나의 참석자들은 정장을 입어야 했다.

그것이 ‘토가’라고 하는 하얗고 가느란 털실로 짠 옷이다.

로마의 원로원들이 입었던 천을 둘둘 감은 것 같은 의상이다.

토가는 고가였기 때문에 가지고 있지 않은 손님은 초대한 사람에게 빌렸다.

9.

기본적으로 로마의 연회는 계란으로 시작해 고기를 메인으로 하고 사과로 마무리 하였다.

그래서 로마의 이런 풀코스 요리를 ‘계란에서 사과까지’라고 부르기도 했다.

계란에 의아해 할 수 있지만 당시의 닭과 계란은 굉장히 귀한 음식이었다.

그래서 웬만한 연회에선 삶은 계란을 통째로 주는게 아니라 슬라이스 해서 아주 조금씩 주었다.

연회의 기본은 식전주, 전채2종, 메인 요리인 생선, 고기, 그리고 디저트 였다.

빵은 언제나 테이블에 있었고 요리와 함께 먹거나 요리 사이사이에 먹었다.

먼저 대야에 손을 씻고 자리에 앉으면 놓인 신상에 짧게 기도한다.

식전주는 와인이거나 허브가 들어간 와인 또는 벌꿀주였다.

이것을 참석자들이 돌려마시면 처음에 나오는 것이 가름을 뿌린 삶은 계란이었다.

계속해서 나오는 첫 번째 전채는 문어나 굴, 야채의 마리네였다.

그외에도 양파, 컬리플라워, 버섯, 아스파라거스, 성게나 식용달팽이가 조리되어 나오기도 했다.

두 번째 전채는 그리스인이 좋아하던 산쥐의 벌꿀구이였다.

또한 올리브열매와 석류이거나, 아니면 게나 새우, 후추가 뿌려진 가재로 만든 경단이 니오기도 했다.

후추는 인도에서 수입되어 굉장히 비쌌다.

케나의 첫 번째 메인요리는 생선이었다. 

광어, 숭어, 철값상어, 굴, 문어 등의 어패류가 나왔다.

로마에서는 고기와 생선이 동급으로 취급받았고, 생선은 신선하고 간단한 요리가 좋다고 생각했다.

다음에는 고기요리가 나온다.

멧돼지 통구이가 많았고, 어린 양이나 어린 염소가 나오기도 했다.

로마인들은 소고기를 먹지 않았고, 기원전 3세기까지는 소를 죽이는 게 금지돼 있었다.

메인이 끝나면 일단 식사가 끝나 손을 씻는다.

하지만 디저트를 위해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마지막의 디저트는 사과인 경우가 많았다.

사과가 아닌 경우에는 석류, 자두, 대추야자 등의 과일 또는 소맥분을 우유와 올리브유에 반죽해 바른 포카치아 같은 과자가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10.

케나에서 요리는 커다란 접시에 담긴 걸 각자 덜어서 먹는 형식이었다.

접시는 은이나 금,청동으로 만들어진 값비싼 것으로 동물이나 꽃, 신들이 그려져 있었다.

국물이 있는 음식은 조리한 냄비째로 가져왔다.

덜어먹는 접시는 저렴한 질그릇으로 1~2번 사용하고 버렸다.

납작한 무발효빵을 접시 대신 사용하기도 했다.

맨손으로 식사를 하는 문화였기 때문에 방에는 향수가 들어간 대야가 놓여 있었다.

일일이 일어나서 손을 씻는 게 불편한 경우에는 테이블보나 냅킨으로 손을 닦았다.

냅킨은 각자가 가지고 오는 게 당연한 것으로 사용할 일이 없어도 언제나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초대 손님은 더러워진 손을 노예의 머리카락으로 닦는 경우도 있었다.

그걸 위해 머리를 길게 기른 나이 어린 노예가 배치됐다.

빵으로 손을 닦는 사람도 있었다.

11.

연회는 보통 밤 9시에 시작되었다.

그리고 짧으면 3시간,길면 9시간이나 계속 되었다.

먹다가 피곤하면 코스 사이의 공백을 이용해 소파에서 잠깐 잠을 자기도 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너무 배가 부르면 일부러 토해서 다음 코스를 먹기 위해 배를 비우기도 했다.

연회 참가자들은 화장실도 가지 않았다.

필요하면 노예가 오줌 받는 통을 가져왔고 거기에 볼 일을 보았다

12.

음식 찌꺼기는 바닥에 그대로 버렸다.

바닥에 버려진 음식은 죽은 자를 위한 것이었다.

초기 로마에는 죽은 가족은 집의 마루 밑 지하에 묻었다.

바닥에 떨어진 음식을 주어 먹으면 귀신이 붙는다고 하여 노예조차 이를 기피하였다.

그래서 죽은 자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바닥을 음식 찌꺼기 모양의 모자이크로 장식하기도 했다.

13.

케나(정찬)에 초대된 손님들이 돌아갈 때 주인은 ‘아포포레타’라는 선물을 손님들에게 지급한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손님의 가족들은 선물을 고대했다고 한다.

손님이 받는 것은 음식, 일용잡화, 장난감 등이지만 사람마다 받는 게 달랐다.

우선 용기에서 제비를 뽑는데 거기에는 수수께끼 같은 시나 말장난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문장에 대응하는 물건을 받았다. 

마치 오늘날의 빙고게임 같다.

14.

그리스,로마에서는 와인을 물에 타서 마시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대로 마시는 건 야만적이라고 여겼다.

와인에 물을 타는 것이 예법으로, 물에 와인을 넣지는 않았다.

그 비율은 2:1, 5:2, 3:1, 4:1 중 하나로 비율에 따라 도수가 달라졌다.

와인은 발효작용을 이용하는 술이기 때문에 언제나 정상적으로 숙성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제대로 보관하지 않으면 변질돼서 시큼해진다.

로마시대에는 장기 보존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변질을 늦추고, 맛을 속이기 위해 여러가지 첨가물을 넣었다.

탁한 느낌을 내기 위해 계란 흰자나 석회를 넣었고 색을 내기 위해 알로에, 사프란을 넣었다.

달콤한 와인을 만들려고 물을 섞은 과즙을 넣기도 했다.

향을 내는 용으로는 허브나 향신료가 사용되었다.

벌꿀, 수지, 바닷물, 눈 등은 그리스 시절부터 전통적으로 사용되어온 첨가물로 양조과정에서 첨가물을 섞기도 했다.

와인에 첨가물을 넣는 것은 로마시대 뿐만 아닌 중세 말기까지 이어졌다.

15.

로마에서 와인 다음가는 술은 ‘아쿠아 무루사’라고 하는 벌꿀주였다.

이것은 물과 벌꿀과 이스트균을 섞어 발효시켜 만든다.

와인은 포도가 자라는 따뜻한 지방이 아니면 만들 수 없지만 벌꿀주는 북방에서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북유럽에서는 인기가 있었다.

로마에서 맥주는 제일 하찮은 술이었다.

노예용의 와인인 ‘로라’ 보다도 질이 낮은 음료로 가격은 로라의 절반이었다.

로마에서는 ‘아리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메르카’는 양이나 염소젖으로 만든 요구르트다.

소화를 돕는다고 여겨져 건강식품으로 이용되었다.

후추나 가름을 뿌리거나, 코리앤더와 소금을 넣어 먹었다.

‘테후루툼’은 과즙을 졸여 만든 시럽으로 로마 어린이들의 음료였다.

물이나 식초에 타서 마셨다.

‘포스카’는 물을 탄 식초로 향신료나 벌꿀을 넣기도 했다.

특히 여행 시에 이용되었다.

여행자들은 식초를 가지고 다니며 생수에 섞어 마셨다고 한다.

그렇게 하면 생수를 마시는 것보다 배탈이 잘 나지 않는다.

예수가 십자가형에 처했을 때, 병사가 마시게 했던 것이 포스카라고 한다.

우유는 아이들의 음료로 어른들은 좋아하지 않고 의사들이 약으로 처방하는 정도였다.

일반적으로 허브를 섞기도 했다.

16.

로마에서는 귀중한 식재료는 사육이나 양식을 통해 구했다.

제일 유명한 것은 산쥐일 것이다.

산쥐를 벌꿀에 절여 구운 요리는 전채의 기본이었다.

이 작은 동물은 ‘그리라리움’이라고 하는 안이 나선형으로 돼 있는 항아리에 가둬서 길렀다.

푸아그라를 먹기 위해서 거위는 고대 이집트에서부터 사육되어 로마에서도 널리 퍼져 살을 찌우게 하였다.

인도가 원산인 공작은 맛은 없자먼 그 모습이 아름다워 연회에 사용되었다.

식용달팽이는 기원전 50년 전부터 양식기록이 있었다.

굴, 장어, 도미, 곰치 등의 해산물도 양식을 했다.

시장에는 수도도 있었고, 내륙지방에서는 어패류가 고급품이었다.

17.

똑같은 조리에 질린 로마의 부유층들은 진미를 찾게 되었다.

비록 맛이 없어도 신기하거나 귀하고 비싼 것이라면 좋았고 먹으면 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맛있는 음식과 진미는 의미가 다르기 때문에 따로 분리해서 생각을 해야 한다.

인기 있던 진미로는 우유에 끓인 돼지 유방, 무화과로 살찌운 돼지간이나 푸아그라, 우유로 살찌운 식용 달팽이, 낙타의 발굽, 살아있는 닭에게서 자른 볏, 플라밍고의 혀, 공작새, 두루미, 잉꼬,종달새의 혀, 거북이, 철갑상어의 알, 성게, 해파리 등이 있었다.

18.

번영기의 로마에서는 사치가 횡행했다.

국민의 낭비벽을 고치고자 때로는 ‘낭비금지법’이 발효되기도 하였다.

서민 대상의 법령은 바르(스낵바)에서 나오는 메뉴의 제한, 부유층에 대해서는 값비싼 식재료에 대한 금지 등이 있었다.

하지만 부유층은 금지품이나 바다의 진미를 밀수로 손에 널었다.

하루 식사에 들어가는 비용에 제한된 적도 있었다.

예를 들어 아우구스투스법에서는 ‘중요한 축제일의 요리에 노예 한 명분 이상의 돈을 들이면 안된다’라는 것이 있다.

당시의 노예 한 명은 현대로 따지면 자동차 한 대 분의 가격이다.

이러한 제재가 있었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저녁 식사 한 번에 2~3천만원의 돈을 쓰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행으로 유명한 황제 엘라가발루스(재위 218~222)는 도를 넘는 요리로 신하와 손님을 대접했다.

10일간 계속해서 1일 30마리의 돼지고기요리(진미로 여기는 유방과 자궁이 딸린 고기), 금가루와 보석가루가 뿌려진 콩요리 진주가루가 뿌려진 버섯요리를 대접하거나, 한 번의 식사에 600여마리의 타조의 뇌를 제공하기도 했다.

진주가 들어간 밥이 나왔을 때는 손님의 그릇에 진주가 들어 있으면 집으로 가져가도 되었다.

이런 식으로 돈을 너무 낭비한 것이 재앙이 되어 황제 엘라가발루스는 불과 수년만에 암살당했다.

19.

서민들이 자주 이용했던 바르(스낵바) 앞에는 돌이나 시멘트로 만든 L자 형의 카운터가 있었다.

여기에는 도자기로 만든 항아리가 묻혀 있었는데 벽돌이 단열재 역할을 해 안의 음식들이 보온이나 보냉이 되었다.

가게 안에 공간이 있으면 테이블이나 의자가 놓여 있었지만 없으면 손님들은 음식을 서서 먹었다.

대표적인 음식들로는 옛날부터 먹었던 콩이 들어간 ‘프로스(소맥으로 만든 죽)’다.

그 외에 인기가 있던 것은 삶은 돼지고기, 장어, 올리브, 무화과, 소시지, 고기경단, 닭고기, 야채 마리네, 치즈, 계란 오믈렛 등이 있었다.

그 외에 와인을 제공하는 가게나 뜨거운 물을 내오는 가게도 있었다.

20.

로마는 시민들에게 빵을 배급했다.

정부는 시민의 생활을 보호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여겼고 후기에는 의원이나 황제가 인기를 얻기 위해서나 수도의 치안을 안정 시키기 위해 배급이 이루어졌다.

배급제가 있었기 때문에 곡물의 가격이 변동 된다거나 곡물 생산이나 매매로 돈을 벌거나 잃는 일은 없었다.

물론 배급은 식민지에서 막대한 세금을 걷었기 때문에 가능한 제도이다.

로마는 풍요로운 사회였으나 노예가 저렴한 가격에 안정적으로 노동력을 제공하게 되자 자유시민은 일자리를 잃고 생활이 어려워졌다.

어떻게든 자급자족을 하고 있는 농원주라도 빈곤하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배급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자는 비참하게 여겨졌고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

부유층은 시민이나 노예에게도 은혜를 베풀었으나 세월이 지나 인플레이션이 진행되면서 로마는 경제적으로 막다른 골목에 몰렸고 결국 쇠락의 길을 걸었다.